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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가족과 시대를 비추다, 90년대 후반의 풍경

by 노랑주황하늘 2026.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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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MBC에서 방영된 가족드라마 ‘나’는 당시 한국 사회의 변화 속에서 가족의 의미와 개인의 자리를 다시 묻는 작품이었다. IMF 외환위기 직후의 시대적 혼란 속에서 이 드라마는 한 가정의 일상과 갈등을 통해 시대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가치와 그로 인한 압박을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특히 세대 간 갈등, 경제적 위기, 가부장제의 흔들림 등은 등장인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며, 단순한 가족 이야기를 넘어서 사회 전체의 구조와 감정을 반영하는 거울이 되었다. 본 글에서는 드라마 ‘나’에 나타난 주요 인물들과 그들을 둘러싼 사회적 배경을 통해, 가족이라는 틀 안에 갇힌 개인의 정체성과 1990년대 후반 한국 사회의 현실을 함께 분석해 본다.

가족 사진

IMF 시대, 가족 드라마가 던진 질문

1998년은 한국 사회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1997년 말 시작된 IMF 외환위기는 단순한 경제 위기를 넘어 국민 개개인의 삶을 뿌리부터 흔들었고, 이는 곧 가정 내 구조의 변화로 이어졌다. 가장이 실직하거나, 주부가 생계를 책임지거나, 자녀가 학업을 포기해야 하는 등의 이야기가 더 이상 드라마적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던 시기였다. 바로 이때, MBC는 ‘나’라는 제목의 가족 드라마를 편성하며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가족 안에서 나는 누구인가?’

드라마 ‘나’는 전형적인 가족극의 외형을 취하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매우 낯설고도 도발적이다. 이 드라마는 가족이란 공간이 과연 안전한 울타리인지, 아니면 또 다른 억압의 장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는다. 주인공 ‘민석’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개인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고, 그의 아내 ‘은영’은 희생을 강요받는 어머니와 여성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자녀들은 부모 세대의 가치관에 반기를 들고, 또래 집단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렇게 각 세대가 서로 다른 현실을 마주하며 충돌하는 과정이 드라마의 주요한 축이다.

당시 많은 드라마가 가족을 '회복의 공간', '정서적 중심'으로 묘사했지만, ‘나’는 다르다. 이 드라마는 오히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차별, 억압, 불균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며 시청자에게 감정적 거리를 두게 만든다. 이는 기존의 감성적인 접근과는 다른 리얼리즘 기반의 서사로, 시청자들에게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가족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나’는 동시대 드라마들과 뚜렷한 차별성을 가진다.

인물의 서사로 본 세대별 갈등 구조

‘나’ 속 등장인물들은 각기 다른 시대 감각을 지닌 존재들이다. 민석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이지만, IMF로 인해 실직한 이후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한 회의를 느낀다. 그에게 가장이란 ‘희생’과 ‘책임’을 전제로 한 타이틀이다. 반면 그의 아내 은영은 처음에는 그 역할에 순응하지만, 점차 남편의 권위가 붕괴되면서 자신 역시 가정 안에서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는다. 그녀는 어머니이자 아내이자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방황하고, 결국 독립적인 인간으로의 전환을 모색하게 된다.

자녀 세대는 보다 급진적인 변화의 주체다. 장남은 아버지의 실패를 교훈 삼아 자립을 추구하고, 딸은 여성으로서 사회적 편견에 맞서기 위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다. 이들의 서사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정체성의 탄생을 상징한다. 이처럼 세대 간의 가치 충돌은 드라마 내내 반복되며, 가족이라는 공간이 얼마나 다양한 목소리를 품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나’가 특정 인물에게 절대적인 옳고 그름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민석은 실직 이후 무기력에 빠지지만, 동시에 가족을 지키기 위한 나름의 방식으로 분투한다. 은영은 새로운 삶을 갈망하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정서에 흔들린다. 자녀들은 변화에 적응하지만, 때로는 무책임한 이상주의를 드러내기도 한다. 이 복합적인 인물 묘사는 ‘나’라는 드라마가 얼마나 세밀하게 사회 구조를 반영했는지를 보여주는 지점이다.

가족극을 넘어, 사회를 비추는 거울

‘나’는 제목처럼 결국 ‘개인’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개인은 사회와 가족이라는 구조 안에서 존재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까지 수많은 갈등과 혼란을 겪는다. 이 드라마는 가족을 통해 시대를 읽고, 시대를 통해 가족의 변화를 이야기한 드문 작품이다. 감정을 강요하지 않고, 교훈을 던지기보다는 질문을 남긴다는 점에서, ‘나’는 1990년대 후반 MBC 드라마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오늘날 이 드라마를 다시 보면, 여전히 유효한 문제들이 많다. 가족 안에서의 불평등, 세대 간 소통의 부재, 개인의 정체성 문제 등은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계속되는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단지 과거의 드라마가 아니라, 현재를 비추는 또 하나의 거울이 된다.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감춰진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각자의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만든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의의는 크다.

드라마 ‘나’는 화려한 캐스팅이나 극적인 전개 없이도, 정제된 리얼리즘과 섬세한 감정 묘사를 통해 시청자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속한 가족, 그 안의 나, 그리고 나아가 우리 사회 전체를 돌아보게 만드는 작품.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되새길 가치가 있는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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