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박열 진실, 사랑, 저항

by 노랑주황하늘 2025. 10. 20.
반응형

박열은 1920년대 일제강점기 조선 청년 박열과 일본 여성 가네코 후미코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로,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과 신념의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는 단순한 항일 투쟁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사상과 신념을 위해 목숨까지 내던진 인물들의 정신적 투쟁을 정교하게 조명한다. 기성 체제에 맞선 젊은 지식인의 모습과, 그 안에 담긴 인간적인 고뇌는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울림이 된다.

 

전쟁 사진

이름을 걸고 외친 진실

박열의 주인공 박열은 무장 항일 운동가라기보다는, 언어와 사상을 무기로 싸운 지식인이다. 그는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동시에 지키기 위해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당당히 법정에 섰고, 자신의 사상과 존재를 전면으로 드러냈다.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그의 태도는 도발적이고 거침없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억압된 시대에 대한 정면 돌파다. 일본 정부는 박열을 조선인 테러리스트로 몰아가려 했지만, 그는 자신이 저지르지도 않은 황태자 폭살 음모를 '차라리 내가 했다고 해라'는 식으로 역이용하며, 법정이라는 공간을 저항의 장으로 만들어냈다. 그의 언어는 날카롭고 정제되어 있다. 일본 법조계와 언론을 상대로 조선인의 처지를 고발하고, 식민 지배의 모순을 조목조목 비판한다. 특히, 피고인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재판정에서 당당히 일본제국의 정의를 조롱하는 장면은 극적인 반전이자 통쾌함을 선사한다. 박열이 사용한 무기는 칼도, 총도 아닌 ‘말’이었다. 말은 시대를 기록하고, 기억하게 만든다. 그의 행동과 언어는 단순한 반일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절박한 저항의 형태였다.

박열은 그가 외친 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며, 우리가 잊고 있던 질문들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경계 없는 연대와 사랑

박열과 함께 등장하는 인물, 가네코 후미코는 단순한 조력자를 넘어, 주체적인 저항자로 묘사된다.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조선인의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는 그녀의 존재는, 이 영화가 단순한 민족주의를 넘어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국적도, 언어도, 배경도 다르지만 같은 신념을 공유하고, 그 신념이 만들어낸 유대는 어떤 전통적인 사랑보다 깊고 강렬하다. 후미코는 박열과의 관계 속에서 단순히 동반자적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일본 사회 내부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전선’이 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후미코가 재판정에서 “나는 박열의 연인이 아니라 동지다”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이 선언은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일본 사회에 대한 도전이고, 여성으로서의 자율성을 드러낸 강한 선언이었다. 그녀는 일본 제국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조선인의 독립뿐 아니라 보편적 인간 해방을 꿈꾼다. 그녀의 신념은 이데올로기의 경계를 넘으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뛰어넘는 강렬한 연대를 보여준다. 박열과 후미코는 감정과 신념, 존재와 투쟁이 하나로 융합된 관계를 통해, 억압 속에서도 가장 인간적인 방식을 선택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이 영화는 연애감정이 아닌 ‘사상적 연대’로 맺어진 사랑이 얼마나 위대할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그들이 법정에서 함께 한 침묵, 시선, 한마디의 언어는 평범한 러브스토리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깊이를 선사한다.

말로 쓴 저항의 역사

박열은 재판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대부분의 서사가 말과 글로 이루어진다. 대사 하나하나, 주고받는 문장마다 시대의 아픔과 인간의 저항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영화는 과장된 음악이나 화려한 액션 없이도, 언어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강력한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 박열이 감옥 안에서 작성한 진술서, 신문사에 기고한 글, 법정에서 외친 문장들은 단순한 자료가 아니라, 당대 지식인의 사상적 투쟁 그 자체다. 그의 말은 시처럼 정제되어 있으면서도 칼처럼 날카롭다. 동시에 후미코의 발언과 행동은 시대의 양심으로서 기록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이처럼 이 영화는 말로 저항하고, 기록으로 싸우는 ‘언어의 투쟁’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내가 가장 강하게 몰입한 장면은 후미코가 일본 형사에게 “나는 단 한 번도 일본의 딸로 살아본 적 없다”라고 말하는 부분이었다. 그 말은 그녀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그녀가 선택한 삶의 방식에 대한 선언이자, 인간으로서의 자각이었다.  언어를 매개로 시대의 폭력과 마주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표현의 자유, 언론의 역할, 사상의 탄압 등은 오늘날에도 계속 이어지는 문제들이다. 이 영화는 그 질문의 시작점으로 ‘말’이라는 도구를 제시하고, 우리가 침묵을 택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조용하지만 강하게 전달한다.

시대와 이념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과 사상의 자유에 대해 묻는 작품이다. 단지 항일운동을 다룬 영화가 아니라, 그 속에서 말하고자 했던 인간의 의지, 연대, 존중의 가치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진실은 언제나 불편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말해야 한다. 박열과 후미코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이 영화는 ‘지금,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남기며, 언어의 가치와 힘을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