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카이거 감독의 ‘패왕별희’는 예술과 현실, 정체성과 욕망이 교차하는 인간의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경극이라는 전통예술을 중심에 두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 무너져가는 인간의 운명을 탁월한 미장센과 연출로 풀어낸다. 주인공 두지(성디예)는 어린 시절부터 경극 무대 위에서 여성 역할을 맡아 살아왔다. 그는 오랜 세월 동안 무대와 현실의 경계를 잃어버리고, 결국 자신이 연기한 배역 ‘우희’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그와 함께 경극 인생을 살아온 절지(장국영)와 샤오루(공리)의 관계는 단순한 사랑이 아닌, 예술과 현실이 부딪히는 삼각 구조 속에서 파국으로 치닫는다. ‘패왕별희’는 예술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혹은 파괴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중국 현대사의 거대한 격변 속에 놓인 한 예술가의 영혼을 탐구한다.

예술과 현실의 경계에서
영화는 경극이라는 전통예술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두지와 절지는 어린 시절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으며 무대의 질서 속에서 자란다. 그들에게 무대는 세상의 전부이며, 연극 속 역할이 곧 삶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예술은 그들에게 도피가 아닌 굴레가 된다. 두지는 여성 배역인 ‘우희’를 연기하며 점점 자신을 잃어간다. 그는 무대 위에서는 아름답고 완벽하지만, 현실 속에서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흔들린다. 그에게 연극은 삶의 대체물이자 감옥이다. 반면 절지는 남성적이고 현실적인 인물로, 무대 밖에서는 삶을 단단히 붙잡으려 한다. 이 두 사람의 대비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천카이거 감독은 이들의 내면을 시대적 배경과 함께 교차시킨다.
일본의 침략, 국공내전, 문화 대혁명 등 격동의 역사가 인물들의 운명과 교차하며, 예술이 시대의 폭력에 어떻게 휘둘리는지를 보여준다. 무대 위에서 완벽했던 경극의 세계는 점차 붕괴되고, 예술가들은 정치의 도구로 전락한다. 두지의 삶은 결국 무대와 현실의 경계가 완전히 무너지는 과정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오직 ‘우희’라는 역할을 통해서만 확인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에게 그 역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예술이 현실을 초월하는 듯 보이지만, 현실은 언제나 예술을 파괴한다. 이 영화는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인가를 묻는다. 그것은 구원의 통로일까, 아니면 잔혹한 자기 파괴의 장치일까. 두지의 삶은 그 답을 모호하게 남기며,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의 신념을 돌아보게 만든다.
사랑과 배신, 그리고 욕망의 삼각
두지, 절지, 샤오루의 관계는 단순한 삼각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형태를 빌린 정체성과 생존의 투쟁이다. 절지는 현실적인 남자로, 동료이자 친구인 두지를 아끼지만, 그 감정은 경극이라는 틀 안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두지는 절지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은 연극적 맥락 안에서만 완성된다. 현실에서는 그 감정이 허락되지 않는다. 여기에 개입하는 인물이 샤오루다. 그녀는 매춘부 출신으로, 절지의 아내가 된다. 그녀의 존재는 두지에게 위협이자 분노의 대상이다. 하지만 동시에 샤오루 역시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녀는 현실 속 생존을 택했을 뿐, 그 선택이 얼마나 많은 감정을 파괴할지 알지 못한다. 세 인물의 관계는 시대의 변화를 거치며 끊임없이 요동친다. 특히 문화 대혁명 시기, 그들의 과거는 ‘반혁명적 예술’로 낙인찍히고, 세 사람은 공개적으로 서로를 고발하도록 강요받는다. 그 장면에서 드러나는 배신과 눈물은 단순한 개인적 비극을 넘어, 시대가 예술가에게 가한 폭력의 은유로 읽힌다. 절지는 두지를 지키고 싶어 하지만, 결국 체제의 폭력 앞에서 무력해진다. 샤오루는 살아남기 위해 타협하고, 두지는 진실을 말하다 파멸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 속에서도 그들의 관계는 끊어지지 않는다. 사랑, 증오, 연민이 뒤섞인 그 감정의 혼돈이야말로 이 영화의 핵심이다. 이 관계는 인간의 본성과 닮아 있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지만, 그 사랑은 동시에 타인을 파괴하기도 한다. 천카이거는 그 잔혹한 진실을 경극의 화려한 가면 뒤에 숨겨놓고, 그것을 관객에게 서서히 드러낸다.
정체성의 파멸과 예술의 숙명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두지는 점점 무너진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연기하는지를 알 수 없게 된다. 경극의 무대는 여전히 존재하지만, 관객도, 시대도, 그를 더 이상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우희의 대사를 읊지만, 그 말들은 공허한 메아리로 남는다. 그의 몰락은 단순히 개인의 파멸이 아니라, 예술 자체의 붕괴다. 예술은 현실을 반영하지만, 현실이 너무 잔혹해지면 예술은 그 앞에서 힘을 잃는다. 두지는 결국 무대 위에서 ‘패왕별희’의 마지막 장면을 재현하며 스스로의 생을 마감한다.
그는 연기와 현실을 끝내 분리하지 못한 채, 예술 속에서만 완전한 존재로 남는다. 그 장면은 관객에게 묘한 감정을 남긴다. 그것은 비극이지만 동시에 해방처럼 느껴진다. 그는 현실에서 벗어나 예술 속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확신할 수 있었다. 천카이거는 이 결말을 통해 예술의 숙명을 제시한다. 예술은 현실을 초월하려 하지만, 현실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진다. 예술가의 운명은 바로 그 모순 속에 있다. 두지는 시대의 희생자이자 예술의 순교자다. 그의 삶은 예술의 순수함이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패왕별희’는 결국 한 예술가의 죽음을 통해 예술의 본질을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며 예술을 갈망하지만, 예술은 언제나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그 벽을 넘어서는 순간, 우리는 인간이 아니라 ‘배역’으로 남게 된다.
‘패왕별희’는 인간의 정체성과 예술의 경계가 어떻게 충돌하는지를 섬세하게 그려낸 비극이다. 경극이라는 전통 예술은 영화 속에서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두지의 삶은 예술이 인간에게 어떤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안겨주는지를 상징한다. 그는 현실 속에서는 길을 잃었지만, 무대 위에서는 영원했다. 천카이거는 이 영화를 통해 예술의 찬란함과 잔혹함을 동시에 기록했다. 시대는 변하고, 무대는 사라지지만, 그가 남긴 질문은 여전히 우리에게 남는다.